[칼럼] 네 번째 혁명이 불러온 연속선상에서 인간과 기계를 들여다보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이뉴스코리아 박은혜 칼럼니스트]

특별해 보이지만 결코 특별하지 않은 것들
다들 살기 어렵다고 한다.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다. 으레 사람들은 위기가 닥치면 새로운 것을 찾는다. 오늘날 체감되는 위기는 대부분 경제 문제로부터 비롯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왜 이리 못살게 되었나 걱정하는가 하면, 뭔가 실력이 없어진 것 같아 불안해한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돌아보면 사실 우리는 그리 잘 살았던 적이 없다. 정직히 실력을 갖췄던 적이 없다. 단지 지난 몇 십 년 동안 잠깐 과대평가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불안과 걱정이 실은 우리의 진짜 모습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위기의 때에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찾는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도 이러한 새로운 것들 중의 하나로 등장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새로움에 적응하기 위해 근본적인 것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움을 위해 우리가 돌아봐야 할 근본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현명하게 답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앞서도 잠시 설명한 것처럼, 사실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독창적인 것, 창조적인 것을 찾지만, 새 것이라고 여겨지는 거의 모든 것들이 사실 헌 것이 아닌 것이 별로 없다. 인류의 역사에서 아직 시도되지 않은 아이디어란 찾기 힘들 정도다.

그 주장에 대한 정당성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4차 산업혁명이 위기의 시대에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1, 2, 3차 산업혁명은 끝내 이루지 못했던―로 여겨질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만큼은 분명하게 들려온다. 4차는 언제나 3차의 영향을 받고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1차, 2차도 그러하다. 4차 산업혁명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을 발견하기에 앞서, 그 안에 담겨있는 오래되고 기본적인 것들을 성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변하지 않는 것, ‘인간성’에 대하여
우리나라 비디오아트의 대가였던 백남준이 남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텔레비전이라는 문물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고조선에서도 텔레비전은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텔레비전이란 멀리서(tele) 본다(vision)는 뜻인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달구경도 전자파의 소산이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다른 다채널이었으며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의 참여가 허용되는 위대한 텔레비전이었다.”

그의 입장을 통해 다시금 생각해 보면, 사실 삶의 양식에는 변하는 것도 있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인간이 밥을 먹고 배설하는 것이 과거에서 미래로 간다고 바뀌지 않는 것처럼. 음식이 변하고 화장실의 구조는 변할지언정, 미래에도 인간은 밥을 먹고 배설할 것이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들, 미래에도 우리가 여전히 가지고 있게 될 것들에 관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해야만 한다. 결국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남을 질문 중 하나는 인간성에 관한 물음이다.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이냐는 물음이 지속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앞에서 되짚어 보는 인간성에 대한 물음들
한스-페터 마르틴과 하랄드 슈만이 쓴 <세계화의 덫>은 인간성에 관한 질문이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결코 소외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중대한 질문이 제시된다. “첫째, 인간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하는 것인데, 경쟁력 있게 일하기 위해 오히려 삶의 질이 희생되고 있지 않은가? 둘째, 경제와 경영의 주체인 인간이 이제는 경제와 경영의 수단과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은가? 셋째, 무한대의 글로벌 경쟁은 인간을 생산적 경쟁이 아닌 파괴적 경쟁으로 몰아세우고 있지 않은가?”

미국 MIT에서 역사를 가르쳤던 브루스 매즐리시의 저서 <네 번째 불연속>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인간은 네 차례에 걸쳐 불연속의 인식을 포기하는 경험을 해왔다고 전한다. 첫째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통해 더 이상 인간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며 우리가 사는 곳이 그리 특별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는 것에 대해 설명한다. 둘째로,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더 이상 인간이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가 아니며 실은 인간과 동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고 전한다. 그리고 셋째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인간은 더 이상 이성적인 동물도 아니며 잘 알지 못하는 배후에 의해 종속된 존재임을 알아차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제 인간은 산업혁명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가 기계와 별개의 존재라는 믿음조차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고 매즐리시는 전망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4차 산업혁명은 앞선 산업혁명들과 구분되는 새롭고 혁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앞서 진행되었던 시도들이 비로소 완성되어가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1차 산업혁명에서 혁신적으로 등장했던 기계가 4차 산업혁명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인간과 더 이상 구별될 수 없을 만큼 뒤섞이게 된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 기계와 인간의 관계
4차 산업혁명이 기계와 인간 사이의 불연속을 해체시키는 최종단계가 될 것이라는 전망은 2020년대를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도 충분히 타당해 보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지점에서 기본에 관한 질문이 다시금 도출된다. 즉,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기 위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다시 물어야 한다고 말이다.

분명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의 시대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기계란 무엇이냐는 서로 다른 질문이 동일한 질문으로 합쳐져 가는 시대가 될 것이다. 곧 기계가 인간에 적응하여 진화할 뿐 아니라, 인간도 인간을 둘러싼 기계에 적응하며 진화하게 될 것이다. 또한 기계를 안다는 것은 곧 인간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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