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윤동주 시인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한 내용입니다.
2017년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지 100년째 되는 해 입니다.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먼저 <1부 – 자라나는 윤동주> 라는 주제로 윤동주 시인의 유년기부터 청년기 초입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인데요.
Q. 윤동주 시인의 유년기 시절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A. 저는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명동촌은 산으로 둘러싸여있는 아늑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죠. 그 곳에서 생의 절반인 14년가량을 살았는데, 아름다운 자연을 벗 삼으며 시인으로서 감수성도 함께 자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땐, 아명을 썼습니다.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해환(海煥)이었는데,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죠. 또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데, 후에도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죠. 명동교회의 장로셨던 할아버지와 집안의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적부터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기독교정신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자라며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고요. 명동 소학교는 많은 민족 지사들을 배출한 민족 교육의 거점이었고, 자연스럽게 일찍부터 민족의식에도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명동 소학교시절 동갑내기 친구들과 <아이생활>, <어린이> 등의 잡지를 구독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던 기억이 납니다. 동기들과 5학년 때인 1929년 손수 원고를 모아 편집해서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기도 했었죠.
*등사판: 같은 글씨나 그림 등을 박아내는 인쇄판인데, 예전에는 손 수 등사기를 사용하여 인쇄를 해야 했다.
Q. 윤동주 시인 얘기를 들어보면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환경에서, 남다르게 성장하신 것 같은데요. 그 후엔 어떻게 성장하셨나요?
A. 소학교에서 졸업할 무렵,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더불어 만주사변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용정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후에 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같은 친구들과 함께 중학교에 진학했죠. 아명인 해환 대신 ‘동주’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 입니다. 중학교 시절은 캐나다 장로회에서 운영하던 학교를 다녀서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웠습니다.
그래서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낸다고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했습니다. 또 옷맵시 낸다고 재봉틀을 돌린 적도 있네요. 자랑은 아니지만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하고, 기하학에도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활기찬 생활을 하면서도 명희조 선생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 쓴 <초한대>라는 시에는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명 선생님의 독립의지와 역사의식을 깨워주는 가르침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죠.
Q. 중학생다운 모습과 또 중학생 답지 않은 면모가 느껴지는 중학교 시절인데요. 작품 활동은 계속 이어나가신 건가요?
A. 네 그렇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던 중 객지생활을 해야 하는 숭실 중학교로 편입했는데요. 그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의 총 15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 무렵 정지용 시인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숭실 중학교 생활을 오래하진 못했습니다.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갔기 때문이었죠.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광명학교에 편입해서 상급학교 진학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도 5편의 동시를 발표했죠.
Q. 청소년기에 이미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셨는데요. 그런 부분에 대해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요?
A. 저희 아버지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만류를 뿌리치고 문과로 진학했죠. 이때 군관학교에 입교하러 중국에 갔다 온 송몽규와 같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연희 전문에서 조선어 강의와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 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 문학 강의를 들으며 제 문학관을 정립해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고, 거기에 맞서서 시 세계를 만들어가는 처절한 몸부림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절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우리 민족을 수렁으로 몰아넣던 때입니다. 그래서 신앙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을 만큼 고뇌와 번민이 깊었고, 동시 쓰기를 그만두었죠. 그 때 쓴 시가 <자화상>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유년기시절부터 성장하면서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떻게 시인으로서 성장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진행될 윤동주 시인의 가상 인터뷰 2부, 3부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