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코리아 권희진 기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의 역사 이론은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하는 이론적 배경과 정의보다 가치 있는 ‘무력 투쟁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가 주장했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서의 역사’의 요지는 ‘참된 아(我)를 지키기 위해 나의 고유성과 전통성을 억압하는 폭력적인 비아(非我)에 대해 관용과 인내가 필요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즉, 비판을 상실한 포용적 관용과 무차별적 인내는 ’100% 순도의 유해성‘을 입증한다.
신채호는 관념에 갇힌 이론을 거부했다. 인간의 삶에서 투쟁은 곧 생존이요 생존으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 인간의 삶에서 갈등과 투쟁 급기야 살육으로 지켜내야 할 가치는 바로 민족의 영속 그리고 동맹과 평화였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힘으로 평화를 찾는 길을 선택했다.
사실 그의 이론은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우리의 삶과도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 혹한의 날씨에도 대중은 광화문에 모여 대통령의 탄핵을 외쳤고 집단 지성의 힘을 결집해 거대 권력을 비판했다. 종국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역사를 바꾼 우리의 ‘촛불 혁명’도 어쩌면 신채호의 사상적 궤를 같이 하는 ‘투쟁하는 민중의 파워’가 아니었나 싶다. ‘투쟁과 갈등’에 나설 용기야 말로 사회와 국가 나아가 인류의 왜곡된 흐름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재판 딜러’양승태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 개시와 4대강의 모래사장같이 끝도 없이 밝혀지는 “나라살림 거덜 내어 내 살림 쌓아 올린” 이명박의 ‘청와대 재테크 테크닉’ 등 우리 사회 속에서 권력과 부조리에 대한 목숨 건 투쟁으로 이제 우리 사회의 정의는 겨우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세계에서 중국과 일본을 무시하는 민족은 한국인밖에 없다고 한다. 중국은 우리나라보다 경제적·문화적 후발주자라는 위치 때문에 그렇다 치자. 그러나 왜 한국인은 일본은 왜?
지난 2018 월드컵이 한창일 때 일본이 아시아의 유일한 16강 진출국이라는 사실에 쓰린 마음을 달랜 적이 있었다. 일본에 8강에 갈까봐 조마조마 한 날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축구의 신은 인류의 염원을 배반하지 않았고 일본은 역전패했다. 일본이 벨기에에 극적인 패배를 맞이하는 날 아침 우리나라의 16강 탈락 여부와 관계없이 ‘와탕카’를 외치는 왜곡된 자아를 마주하게 되었다.
남의 불행이 나의 극락이요 행복이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우승을 하는 것보다 일본이 보기 좋게 패배하는 것이 더욱 행복한 이 왜곡된 심리의 실체는 무엇일까? 인류에 대한 보편성과 비록 비아(非我)일지라도 평화와 정의의 사상에 부합하고 아(我)의 철학과 연대한다면 기꺼이 인류애로 발전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 일본의 승리가 싫은 나는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가졌다고 확신한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일본은 견제와 의심의 대상일 뿐 진정 평화로 나아갈 동맹과 동지의 관계의 시간은 묘연하다.
일본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과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진 숲속에 보물처럼 보존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의 정치가 존속하는 한, 일본에 대한 용서와 관용은 정의를 상실한 ‘오지랖’일 뿐이다.[이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