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코리아 권희진 기자] 아르헨티나의 이과수 폭포를 여행한 적이 있다. 폭포의 맨 꼭대기에서는 발 아래 무지개가 지나가는 장관이 연출되는데 그 장엄한 높이와 위엄에 곧바로 압도당하고 만다. 그곳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인종들이 방문해 다양한 퍼포먼스(?)가 연출된다. 연인들끼리 갑자기 이마를 대고 기도를 하는가 하면 남미의 한 여름을 씻어내기 위해 폭포에 몸을 숨기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위험하지 않은 범위에서 만끽하는 아마존의 체험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이곳에서 몇 명이 몸을 던졌다는 안내판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곳에서의 다이빙은 추락이요 삶에 대한 영원한 작별을 의미하기 때문에 몸을 던지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의미하다. 하지만 수십 명이 그곳에 몸을 던졌다.
중국인 관광객의 4성 고음이 그곳에서도 쩌렁쩌렁하게 울리던 한 때 나는 그곳에 몸을 던진 발상에 대해 천착한 적이 있다. 아름답지만 무서운 곳에서 최후를 맞이한 사람의 그 심리에 대해서 말이다. 가장 천연의 공간에서 자연과 영원히 하나가 되고 싶은 격한 ‘강호가도’의 표현일까 삶의 갖가지 사연과 수장되고 싶은 것일까 심지어 투신이라는 방법은 죽음의 고통에서 자유로울까 등등
미국의 시인 도로시 파커의 이력서(rezume)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면도칼은 아프고
강물은 축축하다
산(酸)은 얼룩을 남기고
약은 경련을 일으킨다
총기 사용은 불법이고
올가미는 풀리며
가스는 냄새가 지독하다
차라리 사는 게 낫다“
그녀의 시 제목이 이력서인 이유는 바로 자신의 자살 이력을 의미한다. 언젠가 반드시 때가 있는 날을 단축하는 대가는 상당하다. 죽고자 하는 사람의 단호한 의지만큼이나 고통이 따르다는 것을 그의 자살 시도 이력을 통해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이과수 폭포에 몸을 던지면 이 세계에 대한 비열함이나 치사함 꼰대와 진상 질량의 법칙 따위는 기억속에서 사라진다. 다만 아마존의 한 조각으로 또 다른 생을 구가할 수도 있지 않은 희망으로 몸을 던지지 않았을까. 생각만해도 고통스러운 자살의 방법 가운데 이과수 폭포에 몸을 던지는 것이 품위 있고 덜 비침한 마지막이 아닐까라는 생각과 망각의 사이에서 이과수 여행은 끝이 났다.
유럽이나 남미 국가들의 경우 인간이 죽음에 대한 존엄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점차 신의 권한을 또 하나 빼앗았다. 출생과 죽음에서 신의 절대적 권한은 인간과 공유 중이다. 사실상 스스로 택한 죽음은 공인되었고 그것에 대한 윤리적 공감대와 필요성이 합치를 이루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비록 나의 종교적 교리에 이반되지만 안락사에 대한 허용에 찬성의 의견을 보탠다.
2009년 장자연이라는 한 배우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그녀의 유서 한 통은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언론 권력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장자연이라는 신인 배우가 떨리는 손으로 유서를 쓸 때의 분노와 증오는 10년 만에 부활했다. 대한민국 최고 권력을 창출할 수도 있고 절명시킬 수 있는 막강한 언론 권력 아래 그간 많은 힘없는 민초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그녀 또한 특별히 다르지 않은 권력 아래 장삼이사였기에 그녀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 같고 여성의 권익을 옹호하는 사회의 사망 선고였다.
자살에는 여러 슬픔이 존재한다. 생활고 누명 억울함 등등 자살의 모습은 어쩌면 세상의 가장 험준한 일상에 깃들여 있어 더욱 슬프게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권력에 결박당한 채 공포와 절규 속에서 죽음으로 대신한 편지의 실체가 밝혀지고 가해자가 법의 심판을 받게 되는 날,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소중한 삶과 진정한 이별을 고할 수 있을 것이다.[이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