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코리아 권희진 기자]1930년대 식민지 시대의 피폐함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놓지 않은 이상의 소설 「날개」의 주인공은 아내와 분리된 세계관에서 고립된 채 살아가는 주인공의 일상과 극복 의지를 다루고 있다.
동 시대에 나온 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23살 옥희 어머니가 당시 여성의 재가를 금기시 했던 풍조 때문에 사랑을 포기했던 내용에 비하면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의 부인은 가히 파격적인 정신세계를 지니고 있다. 남편에게 약을 먹여 며칠 동안 재운다거나 단칸방을 유동적으로 활용하며 매춘을 지속한다. 하지만 소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일탈된 부부의 타락상으로 접근이 아닌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을 살아가는 조선인의 남루한 정신세계에 대한 핍진한 묘사라고 보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이유는 소설의 배경이 현실이 아닌 심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도 없이 사회에서 고립된 주인공의 삶이란 고작 아내의 말에 순종하는 척 미로에 갇힌 아내와의 관계를 고민하고 타인의 삶과 유리된 자신의 번뇌 속에서 시간의 꽈리만을 틀 뿐이다. 주인공은 아내의 삶에 기생하며 살아갈 뿐 어떠한 분노와 질투가 없다.
아내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은 모습은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의 내용 중 ‘밤늦게 들어와 보니 가랑이가 네 개로구나’라며 체념과 달관의 춤을 춘 처용보다는 비교적 현실적이지만…
삶에 대한 어떠한 생동감도 남아 있지 않은 주인공은 자신의 처지와 아내의 삶에 대해 고민도 분노도 없다. ‘분노하지 않은 어색함’의 원인은 거세된 성적 욕망에 기인한다. 어쩌면 질투와 분노 그리고 ‘성적 욕망’은 “인간다움”에 가장 근접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인터넷의 개방성을 통해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 있고 심지어 성적 판타지를 해소할 만한 영상도 소신껏(?) 검색할 수 있는 기반이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이나 샤워실과 같은 지극히 협소한 공간에서의 사생활에 대해 궁금해 하고 심지어 그것을 수집하며 쾌감을 느끼는 심리의 허무함과 무의미를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그 의미 없음을 통해 범죄와 공포 그리고 혐오와 불신이 양산되고 있다. 마치 무의미의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가는 듯하다
인터넷에 ‘쾌감’이라는 말을 검색하니 그 근거에 대한 온갖 비공인 가설이 난무했다. 다양한 인간성만큼이나 다양한 속성을 지닌 사람들의 쾌감의 대상이 오로지 여자의 신체에서 발생하는 일에 집중된 현실이 안타깝다.
1930년대 조선 문단데 모더니즘을 발표해 일대 파장을 일으킨 천재 작가 이상은 「날개」를 통해 도시와 문명화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말살하고 있으며 자유를 잃은 인간의 의식은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묘사하고 있다.
어쩌면 일제의 강압으로 진행되는 조선의 산업화·도시화를 체험한 천재 작가 이상은 결국 인간의 다양성은 부품화 되고 소모적 가치로 전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날개」를 창작했을 지도 모르겠다.
전문화 특성화를 강요받은 세대들이 ‘몰카’의 범법자로 전락한 것도 자유로운 본성을 잃고 자기만의 성적 판타지 갇힌 왜곡된 본능이 아닐까 싶다. 편집된 본능과 왜곡된 쾌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금 더 자유를 꿈꿀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렌즈에 갇힌 “왜곡된 본능”이 좁은 렌즈를 탈출하고 넓은 세상에 눈을 뜰 수 있지도 않을까[이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