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윤동주 시인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한 내용입니다.
어느덧 마지막 시간이다. 지난 <2부 – 살아내는 윤동주>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청년 시절 연희전문 학생 때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삶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 후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겠다.
Q. 연희 전문을 졸업한 뒤에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습니다.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른 단짝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했죠. 그래서 서로 떨어진 채 유학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쉽게 쓰여진 시>의 한 구절입니다. 유학 초기 일본 땅에서 향수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단짝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전입학을 했죠. 도지샤대학은 제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기독교계 학교였습니다. 전시체제하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도지샤의 자유로운 학풍을 호흡하고, 송몽규를 비롯한 벗들과 어울리며 한결 안정된 유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1943년 7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죠. 저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요시찰인: 사상이나 보안 문제 따위와 관련하여 행정 당국이나 경찰이 감시하여야 할 사람.
- 윤동주 시인의 죽음 그 후
이제부터는 기자가 윤동주 시인의 죽음, 그 후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놓아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그 같은 증언을 한 송몽규 또한 20일 남짓 지난 3월 7일 옥중 순국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유해는 북간도에 안장되었다. 그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 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윤동주 시인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후 윤동주 시인의 공훈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등이 수여되었다. 윤동주 시인 기념관도 국내와 중국 등지에 설립되어있다. 하지만 창씨개명과 관련하여 논란도 있었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녹아있다.
문화 콘텐츠 제작도 활발했다. 특집 다큐멘터리를 비롯하여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영화 <동주> 등으로 제작되며 사람들에게 윤동주 시인의 시와 삶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최근 MBC ‘무한도전’ 역사X힙합 콜라보 프로젝트 일환으로 발표된 곡 ‘당신의 밤’은 멜론차트1위를 하는 등 또다시 윤동주 시인에 대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시 내용과 음악이 어우러진 ‘당신의 밤’은 이번 ‘무한도전’ 위대한 유산 특집에서 발표된 곡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올해는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다시 쏟아지는 가운데 시뿐만 아니라 살아온 삶도 재조명되고 있다. 지금도 남겨진 시로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과 대화하는 윤동주 시인. 그의 시는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물음을 던지고 답을 하는지 들어보면 좋을 것 같다.
*참고자료: 국어국문학 자료 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