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은 기사 제목으로만 놓고 본다면 다들 UN의 반기문 전 사무총장을 떠올릴 것이다. ‘세계의 대통령,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UN 사무총장의 직위를 생각하면 최고의 위치에 오른 것은 맞지만, 그에 걸맞지 않게 반기문 총장은 국제기구의 수장답지 못하다는 크고 작은 비난을 UN 사무총장 임기 내내 받아왔다.
JTBC의 보도에 따르면 국제 평화를 수호해야 할 사무총장의 직무가 있음에도 반기문 총장은 줄곧 강대국의 입장만 이해하려 했으며 그중에서도 미국의 입장만 노골적으로 반영해 외신으로 부터 ‘미국의 푸들, 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UN 내부에서도 자신을 따르지 않거나 자신의 의견에 배치되는 직원들에게 보복성 인사를 강행해 수많은 직원이 국제기구에서 떠났고 그중 아흘레니우스 사무차장은 무려 A4 용지 50쪽 분량의 반 총장을 비난하는 문서를 남기고 퇴임까지 했다. 반 총장의 이런 행보는 강대국과 맞서며 평화유지를 위해 힘썼던 전임 코피 아난 사무총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행보여서 더욱 비교되며 외신의 비난을 맞았다.
국내에서의 평가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은 박근혜 정부의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을 강행 처리한 것에 대해 박근혜 정부를 칭찬하는 발언까지 했으며, 전임 사무총장들이 퇴임 후 자국의 정치와 일정 거리를 두면서 바로 공직에 나서지 않았던 전례가 있었음에도 반기문 총장은 사무총장 임기 마지막 해 여러 차레 임기 직후 국내 대선에 출마를 시사하는 행보를 보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대선 출마를 선언한 반기문 총장에 대한 비판적 여론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기사에서 다룰 인물은 반기문 총장과는 달리 국내 외 모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로. ‘아시아의 슈바이처, ‘백신의 황제, ‘Man of Action, 이라 불리었던 국제보건기구(WHO)의 6대 사무총장 이종욱(1945-2006)이다.
1945년 4월 12일 출생한 이종욱 사무 총장은 5살 때 한국 전쟁이 일어나 전쟁통을 겪으며 어렵게 자라난다. 전쟁 당시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보아서인지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남을 구하는 의사가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고 이종욱과 누나 이종원 씨 역시 의사에 대한 꿈을 키우며 자라난다. 그러던 이종욱이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후두암으로 쓰러져 숨지자 집안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의사를 꿈꾸던 누나는 의사를 포기하고 약국을 열어 집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경제적 어려움 탓인지 이종욱이 대학을 갈 나이가 되자 누나는 이종욱에게 한양대 공대를 추천했고 이종욱 역시 한양대 공대로 진학한다. 하지만 의사에 대한 열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종욱은 한양대를 졸업 하자마자 다시 서울대 의대를 지원해 27살의 늦은 나이에 의대생이 된다. 방학 동안 이종욱은 의료봉사를 다니며 세상을 배워서 경기도 의왕시의 한센인 마을 ‘성 라자로, 마을에 자원해 의료봉사를 다닌다. 이곳에서 이종욱은 일본에서 의료 봉사를 온 여의사 레이코 씨를 만났고 그녀에게 반해 청혼하여 명동 성당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이종욱은 공중 보건학을 공부하기 위해 하와이 의대로 유학을 떠났고 하와이 의대를 수료한 뒤 남태평양의 사모아의 병원으로 가서 한센인 치료를 한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 외딴 섬 나라에 의료 봉사를 왔다는 소식은 사모아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이곳에서 이종욱은 한센인들과 어울려 그들의 병을 치료하면서 한센병에 대한 연구를 시작, 한센병 논문을 내며 일본 센다이의 학술 대회에도 참석한다. 이때의 활약으로 이종욱은 ‘아시아의 슈바이처, 라고 불리었고 이 소식은 세계보건기구(WHO)의 관심을 끌었다. 1983년 WHO는 이종욱을 서태평양 한센병 자문관으로 위촉하며 이종욱은 국제기구에서 일하게 된다.
이후 WHO 남태평양지역 사무처 질병 예방관리국장, 예방백신사업국장, 정보화 담당 팀장 등을 거쳐 결핵 관리국장을 역임했고 2003년 1월말 7차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마침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2003년 1월 28일 제6대 WHO 사무총장 자리에 취임하게 된다. 특히 예방백신 사업국장 시절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올려 ‘백신의 황제’ 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이종욱이 사무총장에 임명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We must do the right things
We must do them in the right places
And we must do them right ways”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올바른 장소에서 해야 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이처럼 사무총장 취임사를 마친 이종욱 총장은 2005년까지 300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 약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공약을 내자 많은 WHO 직원들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안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듯한 핑계가 생깁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고민만 하다간 아무것도 못 합니다. 옳은 일만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길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2004년에는 조류인플루엔자 확산 방지와 소아마비·결핵 퇴치 등으로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에 올랐으며. 2005년 12월 에이즈의 날에는 목표로 했던 300만 명에 못 미치는 100 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공급했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런 결과에 대해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며, 재정지원도 늘어나지 않습니다.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지요,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는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입니다.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겁니다.”
이처럼 이전 사무총장들이 이루지 못한 혁혁한 성과를 낸 이종욱 총장은 외신 기자들로 부터 ‘Man of Action, 이란 별명을 또 얻었고 사생활 면에서도 청렴한 삶을 살았다. 세계기구의 사무총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집 한 채 없었고 차는 언제 시동이 꺼질지 모르는 고물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타고 다녔으며 연간 30만km를 이동했고, 150일 동안 출장을 다녔다. 그리고 그는 항상 출장 시 최소한의 수행원 2명과 함께 저가 비행기의 이등석에 몸을 구겨 타며 고난을 자처했다. 세계기구의 수장이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궁핍하게 사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종욱 총장은
“일등석과 이등석은 요금 차이가 큽니다. 수행원이 많다 보면 출장비도 많이 들고요. 우리가 쓰는 돈에는 가난한 회원국이 내는 분담금도 포함되어 있어요. 먹고살기도 힘든 나라에서 세계인의 보건을 위해 쓰라고 내는 돈입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는 없지요…”<출처- 세계의 보건 대통령 이종욱 (박현숙저 )>
라고 하였고 하이브리드 차량에 관해선
“자동차는 각자 형편이나 상황에 따라 타는 것입니다. 나는 WHO 사무총장이기 때문에 친환경 자동차를 탑니다. 사람의 지위와 자동차를 연관 짓는 것은 우리 사회가 더 성숙해져야 한다는 증거입니다.<출처- 세계의 보건대통령 이종욱 (박현숙저 )>
그리고 자신처럼 국제기구에서 활약하고 싶다는 젊은이들에겐
“화려한 외교관을 상상하지 마라. 그리고 편협한 인종주의와 속 좁은 애국심같은 것으로는 국제기구에서 견디기 힘들다. 더군다나 열정 없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라는 조언을 해주며 국제기구의 현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매번 국가 방문 시마다 그 나라의 원수를 만나고 다녀 자칫 자만심에 빠질 수도 있음에 대해 항상 낮아질 준비를 하고 지내며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이종욱 총장은 임기 3년 차인 2006년 5월 22일 스위스 제네바에 회의차 참석 도중 급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향년 61세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유해는 국내로 옮겨져 국립 대전 현충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한국 국제보건 의료재단은 그의 이름을 딴 공공보건기념상을 제정해 국제 공공보건의료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미망인인 레이코 여사는 여전히 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며 현재는 페루의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와 함께 여성의 집을 만들어 주민들의 자급 자족 방안에 힘쓰며 사신다고 한다. 생전에 남편의 건강에 대해 신경 써주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자책을 하며 남편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시고 있다고 한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온 평생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며 세계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물해주고간 이종욱 사무총장. 그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가 좀더 오래 살았다면 세계인은 좀더 건강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해외체류기간이 오래되었고 국내 정치권이랑 연도 닿지 않았던 탓인지 이종욱 총장은 반기문 총장과는 달리 주류 언론의 주목도 별로 받지 못했지만, 반기문 총장 이전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그리고 그의 숭고한 삶의 자세를 많은 사람이 배우고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