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대변하는 열쇳말에 ‘좌절’을 빼놓을 수 있을까? 모진 풍파가 몰아친 2016을 돌아보면 대번에 부정적인 이슈들이 떠오른다. 왜 우리는 이런 참극을 관람해야 하는 걸까? 문득 영화 <4등> 생각이 났다.
1등은 한 명이다. 2등부터 꼴등까지 1등 아닌 사람들은 한 명이 아니라 수두룩하다. 하지만 모두가 4등이 아닌 1등을 갈망한다. 어쩌면 회색빛 2016은 특정 인물 때문이 아니라 1등을 숭배하는 우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4등에 손사래를 치는 극중 엄마는 1등이 고프다. 대놓고 선생의 구타를 용인하며 아들의 1등을 간절히 원한다. 이런 장면을 목격하며 우리는 엄마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고 만년 4등을 하는 극중 준호에게 동정표를 보내며 동일시한다.
내가 4등이라면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남이 4등이라면 동정어린 시선을 보낸다. 1등을 갈망하면서 1등을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엄마와 선생에게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준호가 2등을 하자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의 얼굴에서 나를 발견한다. 1등을 바라지 말든지, 아니면 4등을 위로하지 말든지 둘 중 하나만 해야 할 텐데 말이다.
영화의 결론은 구타를 참은 끝에 준호가 1등을 거머쥐는 장면이 아니다. 좋아서 수영을 하는 모습이다. 좋아서 했는데 1등도 따라온다. 현실에서도 하고 싶어서 했는데 과연 1등까지 차지할 수 있을까? 준호가 만년 4등을 했던 이유는 누가 시켜서했던 역효과에 불과했을까?
그게 아니라 이전까지 맞으며 훈련하며 실력을 쌓았기에 나중에는 즐기면서도 1등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답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니깐 말이다.
누구나 좋아해서 한다고 1등까지 거머쥘 수는 없을 게다. 그러나 좋아서 한다면 준호처럼 얼마간 구타와 모욕을 참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의 중요한 시사점은 구타의 효용성이 아니라 구타를 참을 수 있는 동력에 있다. 그 동력이 갈망인데 1등에 대한 갈망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일에 관한 갈망인지가 결절점이다.
준호처럼 수영을 하고 싶어 구타를 참지 않고 엄마처럼 1등이 하고 싶어 아들 고통에 눈을 감아서 문제가 불거진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저렇게 맞으며 컸으면 1등에 가까운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자문했다.
타의에 의해서라도 욕심이 심어졌다면 지금 이렇게 남루한 삶을 연명하진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는 아쉬움, 그게 나였다. 이 욕심이 2016에 회색 물감을 흩뿌린 것 같아 이러려고 1등을 원한 게 아닌데 싶었다.
괴리는 내가 너보다 우월하고 싶기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4등에 동정표를 보내면서도 1등을 숭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