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뒤에서 벗기 싫어 앞에서 벗는데…뒤에서도 벗어야 한다고 성화네요.”
19금 영화에 주로 출연하는 한 여배우의 한탄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배역을 미끼로 추파를 던지다 거절하면 이 바닥에서 매장을 시켜버리겠다 악다구니를 친다. 비단 영화계만의 일은 아니다. 최근 문학, 미술 등 문화계 전반에서 성추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함께 수필집을 작업했다는 전직 출판 편집자에 의해 성추행 및 성희롱 발언이 폭로된 ‘은교’, ‘고산자’ 등의 박범신 작가는 23일 자신의 트위터(@ParkBumshin)에 사과문을 게재했다. ‘목숨’, ‘식물의 밤’ 등의 박진성 시인은 작가지망생들의 성추행 증언이 잇따르자 22일 자신의 블로그(blog.naver.com/poetone)에 사과문과 함께 향후 모든 문학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18일에는 유료 웹툰 플랫폼 레진코믹스에서 ‘미지의 세계’를 연재하는 이자혜 작가가 미성년자 성폭행을 부추기고 방조했다는 피해자의 폭로도 이어졌다.
이후 일민미술관의 함영준 책임큐레이터, 1세대 인디신인 황신혜밴드이자 현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김형태 사장 등도 피해자들에 의해 성추행 추문이 폭로됐다. ‘삼류극장에서의 한 때’ 등의 배용제 시인도 습작생으로 있던 미성년자들을 포함한 여성들을 강제 성추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과와 더불어 이후 활동을 전면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일주일 동안 거의 날마다 문화계 유력인사들의 성추문이 폭로된 셈이다.
잇따른 성추문 파문의 공통점은 성추행이나 폭행 등 신체적, 언어적 폭력 피해자들이 사법부나 공식적인 절차를 따르기 보다는 SNS나 메신저로 이 사실을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물리적인 힘이나 업계 영향력 등에서 지위적으로 우위에 선 가해자들은 하나같이 “네가 너무 예쁘기 때문”이라거나 “성공하려면 당연한 통과의례”라는 당위성을 내세운 ‘위계에 의한 폭력’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현재 밝혀진 사례에 해당하지 않는 익명의 성추행 피해자는 “수치심과 가해자의 영향력에 두려움이 앞서는데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감에 쉽게 나서기 어렵다”며 “여전히 자신의 피해를 숨기고 있는 여성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숨어 있던 성범죄 피해자들이 SNS로 피해 사실을 알리면서 문화산업 내 만연했던 성추행들이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성범죄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자각 없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용제 시인은 사과문에서 “자각 없이” 잘못된 행위를 계속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범죄가 아닌 당연한 권리라고 느끼는 한 성범죄 피해자는 끊임없이 양산되고 상처받게 되는 점입가경의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