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코리아 권희진 기자]김아중이 출연하는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는 성형미인으로 거듭나는 추녀의 눈물 나는 인생사가 그려진다. “예쁜 여자는 명품 못생긴 여자는 폐품 그보다 못한 주인공은 바로 반품”이라는 대사의 라임의 ‘품’은 여자가 상품이 되는 사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길거리의 미녀를 보는 것은 ‘심미성’의 본능을 가진 누구나 즐거운 일이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도 선생님의 미모를 가늠할 정도니 인간들의 ‘미추’를 가르는 본능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성형대국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요즘은 성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많이 희석되었다. 연예인들의 성형 사실은 더 이상 ‘치욕의 과거’가 아닌 웃기지만 슬픈 태생으로 인한 그들만의 눈물겨운 ‘인생 수난사 극복기’정도로 인식될 뿐이다.
성형 종류도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단지 얼굴이라는 범위에 국한되지 않고 머리털의 경계를 허물고 이마를 당기는 수술이며 라메네이트라는 ‘성형 치아’로 인해 통해 비현실적인 ‘하얀 치아’를 찾는 이들이 치과에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여자들의 ‘예뻐지기 위한‘노력은 부모님의 은혜만큼이나 끝이 없다. 성형의 부작용보다 예뻐지고 난 후의 ’인생 역전‘의 가치가 훨씬 크기 때문에 성형으로 인한 충격적인 사고와 사망 사건은 성형으로 인한 욕구를 불식시키지 못한다.
최근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탈코르셋’ 캠페인이 열렸다. 심지어 도심 한 복판에서 여성들의 상의 탈의 퍼포먼스를 감행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니 ‘누구 좋으라고 저 짓을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자는 남자와 그 남자들이 지배하는 사회의 시야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예전에는 한복의 가슴 끈으로 몸이 드러나지 않도록 결박했고 현재는 코르셋으로 여자의 몸을 가둔다. 남자의 시선보다 오래된 관습과 ‘여성다움’혹은 ‘여자다움’의 위력으로 인한 억압이었다.
그들은 사회적 정의감으로 ‘죽으면 썩을 몸’을 기꺼이 여성 해방운동에 희생한 것을 통해 같은 여성으로서 깊은 찬사와 영감에 조응해야 한다는 부채감마저 들었다. 그들은 맨몸으로 조롱과 멸시 그리고 여권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결론은 신선했지만 결국은 불편했다.
세상이 변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여성부’를 만들고 군대 가산점은 폐지되고 호주제도 폐지되었다. 사회는 여성을 뒤돌아보기 시작했고 역차별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여권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물론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아직도 결혼과 육아 그리고 ‘여자’라는 굴레에 ‘자아’를 상실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사회는 여전히 진보의 ing를 향하고 있고 그 안에서 ‘여성’이라는 화두가 배제된 적은 없었다.
삶은 여전히 은유법과 비유로 가득 차 있고 오늘도 시야를 벗어나 있는 인권과 사회 문제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지만 우리나라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의 시야’라는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외치고 여성 해방에 대한 캠페인은 아직 멀다. 패미니즘이라는 이상적 틀에 박혀 ‘여성’이라는 동지애의 개념도 없이 오늘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우리나라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인구는 농·어·축 산업 인구를 앞지르고 있으며 여성노인의 빈곤율의 상황은 더욱 비참하다. 여성이 세대와 계층을 아우르는 연대 없이 과연 ‘탈코르셋’문화를 외친다면 여성 운동은 ‘인권’에서 괴리된 신기루에 불과하다.[이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