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기획보도] 윤봉길,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

※본 내용은 윤봉길 의사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한 내용입니다.

[이뉴스코리아 박양기 기자] 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광복절을 맞아 이뉴스코리아는 독립을 위해 운동했던 이들에게 감사하며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실어보려 한다.

윤봉길 의사의 옛날 사진 (사진제공=국가보훈처)

윤봉길 의사에 대해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도시락 폭탄’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일본에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투사로 기억되고 있는 윤봉길 의사를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가상의 윤봉길 의사와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Q. 도시락 폭탄을 던지신 윤봉길 의사가 맞는지?
A. 별명은 봉길 이름은 윤우의라고 한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데, 도시락 폭탄을 들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던진 폭탄은 ‘물통’형의 폭탄이었다. ‘도시락’형 폭탄은 자결용으로 들고 행사에 참여했으나 직접 던졌을 때 불발됐고 현장에서 군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Q.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들었다.
A. 나는 지금 시대로 따지면 초등학교로 생각할 수 있는 보통학교도 중퇴했다. 덕산공립보통학교를 다녔었는데, 그 시절 나에게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고 3.1독립 운동에 참여하면서 학교를 자퇴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후 독립을 위한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아이들에게 가르쳤으며, 농민독본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농촌게몽운동 의식을 전하려고 노력했다.

Q. 젊은 나이에 죽게 됐다. 억울하지는 않은지?
A. “우리 청년 세대는 부모의 사랑보다도, 형제의 사랑보다도, 처자의 사랑보다도 일층 더 강의(强毅)한 사랑이 있는 것을 각오하였습니다”

내가 그 시절 어머니에게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우리는 그때 그 어떤 일보다 대한민국의 독립이 중요했고 그를 위해 몸을 움직였었다.

Q. 폭탄을 던졌을 때의 상황을 듣고 싶다.
A. 1932년 4월 29일 일본의 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행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될 예정이었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독립의지를 보여줄 기회였다. 오전 11시 40분쯤 행사 중 일본의 국가 연주가 끝날 때쯤 품 안에 있는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뺏고 단상 위에 폭탄은 던져졌다. 폭발로 몇 명은 사망했고 누군가의 다리는 절단됐던 것까지 본 것 같다.(실제로 일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가와바타 사다쓰구는 사망했고 주위 몇몇은 부상을 입었다)

Q. 지금의 대한민국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본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는 청년들에게 나이가 많지 않아도 학력이 높지 않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꼭 돈을 많이 벌고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의미 있게 사는 법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도 해주고 싶다.


삼청동에 그려진 윤봉길 의사의 모습 (사진=박양기 기자)

윤봉길 의사는 폭탄을 던진 후 군인들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그 당시 군인들에게 끌려가던 사진과 실제 윤봉길 의사가 동일 인물이 아니다는 얘기도 전해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방송이 보도되기도 했었다. 관련된 루머가 궁금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그 시기에 대한민국이 어떤 상황이었고 윤봉길 의사는 어린 나이에 어떤 선택을 했으며 어떤 행동을 보여줬는지에 대해 더 얘기해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너무나 더운 계절인 8월을 보내는 동안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노력해 왔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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