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코리아 심건호 기자] 8월15일은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1949년 10월1일 제정돼 시행되고 있다.
광복에 앞서 많은 독립운동가와 국민적인 항쟁 등이 힘을 합쳐 광복을 이뤄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들 중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채광묵(1850~1906)은 홍주의병 항쟁으로 알려진 독립운동가로 아들 채규대와 함께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막다가 순국했다.
채광묵은 홍주에서 태어났으며 의병에 참여한 것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발하고 단발령이 내린 직후였다. 그는 안창식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홍주의병에 참여했으며,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의 홍주 의병항쟁은 한말 의병사에서 대표적인 의병항쟁으로 평가된다.
의병항쟁을 하지 않을 때에는 상소문을 올려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애통함을 나타냈으며, 조정의 교지에 답한 그의 시는 당시 일제와 친일 세력에 대한 그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대한제국의 나라 光市 산속에 숨어 / 光武國中光市隱
빛을 감추고 몸을 아끼나 이름이 없음이여 / 韜光自愛嘿無名
원수와 아직도 같은 하늘아래 있으니 살아있음이 부끄럽구나 / 讐天尙戴生猶愧
의로운 길을 찾았으니 죽음 역시 영예롭다 / 義路能尋死亦榮
1904년에는 일본인이 우리나라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한 일에 대해 성토하는 통문을 작성해 철도와 어업 등의 이익이 일본인 손에 들어가는 현실에 비통해 했고, 산림과 진황지 개척을 청구한 것에 대해 일본 공사를 찾아가 질책하며 대처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됬을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공격했지만 일본군과 관군의 합세에 못이겨 의병이 해체됐으며, 채광묵은 전투에서 패한 후 집으로 피해있었다. 1906년 다시 의병에 가담할 때는 아들 채규대와 함께 출진해 홍주성을 수복했다.
이 후 일본군의 많은 병력투입으로 인해 홍주성이 공격받으면서 채광묵 부자는 성으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막다가 순국했다. 당시 황성신문에서도 그의 죽음을 다뤘으며, 시신을 찾지 못해 부자의 의복을 수습해 장사지냈다고 기록돼있다.
현재 채광묵 부자의 묘는 충남 청양군 남양면 신왕리에 있으며, 채광묵의 충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이뉴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