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며,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한 내용입니다.
420년 전 정유년 1597년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왜군을 대파하는 기적을 쓴 해이다. 2017년 정유년을 맞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지난 <1부 – 청년 이순신>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무관으로 성장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2부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장군으로 불리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Q. 임진왜란까지는 어떠한 삶을 살아내셨나요?
1576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처음 관직을 받았습니다. 이어 함경도에서 변경 지역의 방어를 위해 군사 증원을 조정에 요청했지만 조치는 없었고, 결국 여진 세력의 침입을 받고 적은 군사로 막아낼 수 없어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패전을 이유로 파직당했습니다. 당시 군사 증원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던 조정에서 패전을 이유로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했죠. 이에 따라 중형은 면했지만 첫 번째 백의종군을 해야만 했습니다.
후에 임진왜란 발발 전에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습니다. 일본군 첩자였던 요시라의 간계에 빠진 조정은, 저에게 수군을 이끌고 나가 가등청정의 함대를 요격하라는 명령을 거듭 내렸죠. 조정의 명령을 따랐지만 바닷길이 워낙 험난하고 일본 수군의 복병에 의한 기습공격을 경계하여 신중한 군사작전을 펼쳤습니다. 이에 대해 조정은 제가 명령을 어기고 왜군 함대를 요격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했습니다. 그에 따라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을 박탈하고 투옥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제가 파직된 죄목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업신여긴 죄
둘째, 적을 쫓아 치지 아니하여 나라를 등진 죄
셋째, 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죄로 빠뜨린 한없이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
이때 판중추부사로 있던 정탁이 신구차를 올려 저를 적극 변호하였습니다. 이 상소문은 1,298자로 이루어진 명문으로, 조정은 이 신구차로 인해 저에게 극형만은 면하게 한 뒤 백의종군을 명했습니다.
Q. 임진왜란이 발발 한 후 전란 중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591년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정읍을 떠나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했습니다. 부임 후 판옥선과 거북선을 새로 건조하고 훈련 체제와 무기 상태를 점검하는 등 외적의 침입을 대비했죠. 시간이 지나 1592년 4월 13일 일본은 대군을 동원해 우리나라를 침략했고, 부산과 동래가 순식간에 함락되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여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월 2일) 조정은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에 도착했죠. 개전 두 달 만에 우리나라는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렸었습니다. 일본의 침입에 대한 소식은 4월 15일 전라좌수영에 전달되었지만 5월 4일 함대를 출격시킬 수 있었습니다.
함대는 5월 7일 옥포에 이르러 3회의 접전 끝에 왜선 40여 척을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중상을 입었지만 계속해서 전투를 수행해 승리했습니다. 6월 5일 당항포해전과 6월 7일의 율포해전 등에서 72척을 격침하며 우리 수군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7월 8일의 한산도 해전에서는 학익진을 펼쳐 일본 함대를 크게 격파했습니다. 7월 10일의 안골포해전에서는 적선 42척을 격침했죠. 그리고 9월 1일 부산포를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침몰시켰죠.
병사들이 분발해주어 임진년 5월 7일 옥포해전부터 계유년(1598) 11월 18일 노량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1597년 1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혹독한 신문을 받은 끝에 4월 1일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크게 슬퍼했습니다. 나흘 동안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해야 했죠.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동안 소강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7월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하고 말았죠.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월 16일)과 전주(8월 25일)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는 가운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습니다(8월 3일). 임명 교서에 “지난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적혀있었죠. 그때 제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2척이 전부였습니다.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명량해전에 나아가 싸웠습니다. 왜군이 133척의 배로 공세를 취하고 있었고 우리 수군은 불과 12척의 배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울돌목의 좁은 수로에서 일자진을 치고 적의 수로 통과를 저지하며 일본군을 묶어놨죠. 조류의 방향이 바뀌면서 서로의 진영이 뒤엉키기 시작할 때 우리군은 적장 구루시마의 목을 베어 사기를 높이며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일본군은 30여 척의 배를 잃고 퇴각했죠.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였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과 자세는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글씨에 담아놓았습니다. 이 싸움으로 우리 군은 다시 제해권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일본군은 수군을 이용해 전라도로 침입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터의 영웅으로 우리에게 알려져있다. 직접 임진왜란 당시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필사적인 노력과 진중함이 전해져온다. 외세의 침입과 혼란스러운 국정 속에서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국방에 사력을 다한 이순신 장군. 그 모습을 지금의 우리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3부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죽음과 그 후에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참고자료: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한국의 위대한 인물, 국립중앙도서관) 명량해전 (한국고중세사사전, 2007. 3. 30., 가람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