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은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은 정치, 언론, 재벌의 카르텔(Cartel) 속에서 하수인 노릇을 하던 내부자가 배신을 당한 뒤 검사와 손을 잡아 그들의 비리와 거래를 폭로한다는 통쾌한 내용으로 흥행을 했다. 하지만 1년 뒤 국민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목도 했고 아직 그 분노 속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2016년 10월 24일 JTBC의 최순실 태블릿 보도가 있은 후 분노한 국민들은 2달 넘게 광화문을 가득 채웠고 결국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직무가 정지된 후에도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새누리당의 친박 세력과 청와대 직원들, 최순실의 측근들은 사안에 대해 계속 모르쇠로 일관해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검찰 조사와 국회 청문회에 ‘내부자들,이 연일 양심선언을 하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비리를 고발하고 나서 상황은 급 반전 되고 있다. 더 블루K 의 상무이사인 고영태, K스포츠 재단의 부장인 노승일, 미르재단 사무총장인 이성한, 최순실의 조카인 장시호가 연일 작심한듯한 강도 높은 증언과 더불어 증거 자료를 스스로 제출했다.
장시호는 JTBC가 입수한 태블릿 이외에도 자기가 보유하고 있던 태블릿 PC를 특검에 제출했다. 특검은 장씨의 태블릿 PC에서 최순실이 독일에 설립한 회사인 코레 스포츠, 삼성의 지원금 수수와 관련된 다수의 이메일을 찾아냈다고 밝혔고, 특검은 1월 12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소환했고, 혐의 입증에 강력한 자신감을 보였다.
이처럼 우리 역사에는 대형사건이 터질 때마다 내부자들의 양심고백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많았다. 그래서 특집으로 역사를 바꾼 내부자들에 대해 소개해 볼까 한다.
윤석양
윤석양은 1990년에 국군 보안 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가 정치, 노동, 종교, 재야 시민사회 등 각계 각층의 주요 인사와 민간인을 상대로 정치 사찰을 벌인 사실을 폭로했다.
윤석양 이병은 한국 외국어 대학교 재학시절 ‘혁명 노동자 계급 투쟁 동맹 ‘ 사건에 연루되어 국군 보안 사령부에 체포되어 연행되었고, 이후 강제로 군에 입대 되어 서빙고 대공 분실에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대공 및 학원사찰 업무를 80일 동안 담당했다.
그렇게 근무 하던 와중 윤석양 이병은 청명계획이라는 문서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것을 폭로하기 위해 1990년 9월 23일 새벽, 위병소 근무자가 다음 근무자를 깨우기 위해 내무반으로 들어간 시간을 이용하여, 청명 계획의 문서가 들어있는 파일과, 민간인 사찰 계획의 사찰 대상자 명부철, 세 장의 플로피 디스크를 가지고 탈영 한다. 탈영 후 군 수색대의 수색망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하던 윤석양 이병은 한겨레 신문의 기자와 더불어 지인들의 도움으로 10월에 어렵게 기자회견을 열었고 기자회견에서 정치계, 노동계, 종교계, 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 1,303명을 상대로 정치사찰을 벌였다고 폭로 했다.
청명계획의 주요 내용은 쿠데타와 비상계엄이 발동될 경우, 쿠데타에 방해가 될 만한 민간인들을 신속히 체포하기 위해 보안 사령부에서 미리 체포목록을 작성한 것이었다. 그 민간인들이 어떤 정치 성향이냐에 대한 평가와 함께 체포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 정보중엔 자택의 가구 배치, 진입/도주 가능 경로등과 친인척의 주거지와 관련된 자료까지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왔다.
청명 계획 목록엔 정,재계 인사들과 시민사회를 이끄는 인물들, 각계각층의 수많은 인물들의 정보가 담겨 있었고 당시 야당의 총재였던 국회의원 김영삼과, 시민 사회에서 독재 정권 타도 운동을 하던 노무현 변호사도 A급 인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명단에 들어있던 145명은 곧바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낸다.
그리고 이 폭로 사건으로 대한민국 헌정 사상 제3의 군사 쿠데타가 실행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차기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국군 보안 사령부를 해체 후 기무사령부로 재 개편한다. 폭로 후 한국기독교협의회에서 보호받던 윤석양은 91년 5월에 지역 신문사 편집부로 자리를 옮겨 92년까지 기자로 일했다. 허나 군 기무사 수배자 명단에 올라있던 윤석양 이병은 기무사 헌병에 체포되어 영창신세를 졌고 94년에야 풀려난다. 이 사건은 후에 영화 <변호인>, <모비딕>의 모티브가 되었다.
이지문
윤석양 이병의 폭로 후에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정치 군인들은 아직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진 후에도 계속 정치권에 이런저런 압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사병들로 하여금 강제로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와 투표를 강요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은 이지문 육군 중위의 양심선언과 고발로 군 부재자투표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진다.
1991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ROTC 29기로 임관해서 육군 제9보병사단 28 연대 2대대 6중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이지문 중위. 그는 운동권 출신 대학생은 아니었지만 중위 복무 당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군에서 노골적으로 여당인 민주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도록 정신교육을 할 것과 부재자 투표에서 무조건 기호 1번을 투표하도록 하고, 그렇지 않으면 투표용지를 빼앗거나 불이익을 주도록 할 것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1992년 3월 22일 밤 공명 선거 실천 시민 운동협의회 전국본부 사무실에서 이지문 중위는 기자회견을 열고 이 사실을 폭로했다.
기자회견 직후 이지문 중위는 육군 수도 방위사령부 소속 헌병들에게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 해 4월 파면 처분을 받았다. 그는 원래 삼성그룹에 취업이 예정된 사람인데, 파면으로 인해 육군 이등병 전역 처리당해, 채용이 취소되어 버렸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행정 소송을 제기했고 1993년 12월 대법원에 의해 파면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 후 이지문 씨는 잠시 정치권에 진출해 당시 1995년부터는 민주당 소속 서울시의원을 지냈고 이후 시민사회운동가로 활동, 연세대에서 추첨 민주주의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선거 대신 추첨을 통해 국회의원,지방의원을 선출하자는 추첨 민주주의 국내 유일 연구자로 학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2017년 현재 사단법인 한국공익신고지원센터 소장, 연세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이렇듯 수십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정치 군인들, 이른바 하나회 소속 군인들은 윤석양, 이지문 중위에 의해 아직도 국가를 자신들이 휘어 잡겠다는 망상을 꿈꾸고 있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군부 독재 정권에 의해 젊은 시절 많은 탄압과 고통을 받았던 김영삼 대통령의 강력한 주도하에 93년에 줄줄이 강제 전역을 당하며 완전히 해체 된다.
▶내부자들, 그들이 역사를 바꾼다 ② 에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