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4년 전 취임선서 하던 곳에서 탄핵 받은 朴대통령

▲정세균 국회의장이 9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사진=정세균 의원 트위터)

9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됐다. 4년 전 국민들의 기대를 받으며 취임선서를 했던 곳에서 정치생명을 건 심판대에 오르게 됐다. 일각에서는 야3당과 비박계는 물론 친박계 내부에서도 숨어 있던 ‘샤이 찬성표’가 대거 나오면서 이번 탄핵 소추안으로 박 대통령의 정치 생명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 10월 24일 문건유출 의혹을 담은 ‘최순실 태블릿 PC’ 보도 이후 46일 만에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의 모든 권한은 중지됐다.

약 4년 전인 2013년 2월 헌정사 첫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헌정사 두 번째 탄핵을 받은 대통령의 불명예를 안게 됐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에도 3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펼쳐왔다.

하지만 집권 4년 차에 터진 ‘최순실 게이트’는 역대 대통령의 통상적으로 겪는 레임덕 수준을 넘어 국민으로부터 즉각 하야 요구를 받는 초유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박 대통령이 지난달 4일 대국민담화에서 언급했듯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곁을 지켜줬기 때문에 스스로 경계의 담장을 낮추었다”던 최 씨에게 발목이 잡혀 더 손써볼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1997년 11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 입당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1979년 10월 26일 선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칩거생활을 해오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를 방관할 수 없다며 대중 앞에 나선 것이다.

이듬해인 1998년 4월 박 대통령은 대구 달성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뒤 정치인으로 본격 데뷔, 19대 때까지 5선 의원을 지냈다.

미래연합 창당 등 혼란기를 거쳐 박 대통령이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시점은 2004년부터다. ‘차떼기’로 상징되는 불법 대선자금 사건으로 여의도 당사를 팔고 염창동 천막당사 생활을 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등장한 것이다.

이때부터 박 대통령은 2년 3개월 동안 당 대표를 지내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와 지방선거 등에서 당시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상대로 ‘40대 0’이라는 완승을 거뒀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유력 대권 주자로 발돋움한 박 대통령은 2007년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 하지만 서울시장 출신의 이명박 후보와 접전 끝에 패배했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연설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박 대통령은 17대 대선과 18대 총선을 거치며 당내 비주류로 전락한 친박계를 이끌었고, 2009∼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 때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원안을 고수해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키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이때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더욱 확고하게 다졌으며 이는 2012년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4년 차에 터진 최순실 파문은 박 대통령의 18년 정치 인생을 뿌리째 흔들었다. 풍문으로 나돌던 박 대통령과 최 씨와의 관계가 확연히 드러났고,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이날 탄핵 소추안 가결로 최장 180일 걸리는 탄핵심판의 법리 싸움에 18년 정치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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