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줄리, 소나기 그리고 밴드보컬 잭, 뮤지컬 ‘리틀잭’ 김경수

▲뮤지컬 ‘리틀잭’의 김경수.

 

“줄리의 힘이죠. 사랑, 그게 움직이게 하는 것 같아요.”

김경수는 오롯이 잭이었다. 황순원의 ‘소나기’를 모티프로 1960년대 영국의 마틴클럽에서 열리는 콘서트 뮤지컬 ‘리틀잭’의 김경수는 2시간여를 거의 혼자서 끌어가는 그 힘의 원천 역시 “줄리와의 사랑이며 추억”이라고 했다.

“배우 김경수로서 라기 보다는 줄리를 추억하는 잭으로, 추억에 빠지면서 다시 그때 그 순간으로 돌아가 즐기게 되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을 잊지 못해 슬픈 게 아니라 항상 옆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동력이 되죠.”

잭과 줄리의 풋풋한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비가 내린 날 만난 그는 꼭 잭과도 같았다. 우산도, 무대 위 잭을 연상시키는 의상도, 오전에 창작산실 작품 ‘광염소나타’ 리딩 공연으로 다소 가라앉았다는 목소리도.

▲뮤지컬 ‘리틀잭’의 김경수.

 

◇어쩔 수 없는 애드리브?

“처음엔 관객반응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요. 진짜 살벌했죠. 당장 인물 완수에 급급했어요. 혼자 이끌어 가야하는데다 대사량도 엄청나거든요. 게다가 저는 애드리브에 능한 배우가 아니에요. 대본에 충실한 편이죠.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계속 쫓아가다 보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유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이 공연은 그게 쉽지가 않아요. 큰 틀을 따라가면서 어쩔 수 없이 애드리브로 공연을 진행해야하죠.”

콘서트 형식이다 보니 객석에서는 다양한 리액션들이 돌아온다. 잭의 천연덕스러운 잘난 체에 비웃음이나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짓궂은 장난을 걸어오는 이들도 있다.

 

이 같은 반응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공연을 진행하는 품새가 꽤 능숙해 보이는데도 “어쩔 수 없이 하는 애드리브”란다.

“코미디 잘 하는 분들을 정말 존경해요.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이나 호흡이 대단한 거 같아요.”

 

◇오롯이 밴드 리틀잭의 보컬로! “마룬5의 제스처와 뉘앙스 분석했죠

 

▲뮤지컬 ‘리틀잭’의 김경수.

 

‘리틀잭’에서 만큼은 배우가 아닌 가수로 무대에 오른다는 김경수는 “예전 대본분석 때는 나와 닮은 점 다른 점을 고민했던 거 같은데 잭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결국 제 얘기니까요. 지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고 과거엔 어떤 감정 가지고 있었나에 집중한 것 같아요. 사랑하게 되고 이별하고…극단적인 죽음을 빼면 일반적으로 가지는 감정이잖아요. 저 역시 사랑의 실패도 겪어 보고 연애도 많이 해봤거든요. 이유 없이 이별을 당해본 적도 있죠.”

실용음악과 출신으로 음악을 좋아하고 악기 연주가 흥미로운 그에게 ‘리틀잭’은 가수로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되게 ‘심플’해요. 잭이 가수니까요. 컴백 콘서트를 진행하는데 회상장면은 쇼인 거죠. 제가 뮤지컬 배우로서 극적인 드라마에 들어가기 보다는 줄리의 대역이 돼주는 한 여인을 두고 공연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고 잭은 가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이 회상 장면을 준비했어요. 이 회상에 어울리는 곡 불러드릴게요’라는 게 맞다고 생각한 거죠.”

이에 그는 평소에도 좋아했던 마룬5의 공연실황을 보며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떻게 심취해 자기만의 음악을 들려주는지 그들의 제스처와 뉘앙스들을 꼼꼼히도 분석했다.

 

한국어 가사로 브릿팝의 맛을 살린 넘버들, 그 핵심은 ‘심플’

 

▲뮤지컬 ‘리틀잭’의 김경수.

 

“저도 신기했어요. 코드 진행들이 단조롭고 심플해요. 특히 ‘심플’은 영국밴드가 부르는 노래 같죠.”

‘리틀잭’의 넘버들은 전형적인 팝 멜로디를 따르고 있다. 가장 한국적인 황순원의 ‘소나기’를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풀어낸 ‘리틀잭’처럼 넘버들 역시 분명 한국어 가사인데 신기하게도 브릿팝을 연상시킨다.

“설정상 ‘리틀잭’의 넘버들은 밴드 보컬인 제(잭)가 쓴 곡들이에요. 가사를 말처럼 쓰지는 않을 거 같았어요. 마지막 넘버인 ‘마이걸’은 가사의 뜻도 제대로 이어지질 않죠. 하지만 배우가 아닌 가수로 무대에 오르니 힘든 게 아니더라고요. 말하고 싶은 부분만 적고 뒷말은 내 머릿속에 남겨뒀겠죠.”

첫 곡인 ‘왓 어바웃 미’부터 ‘심플’, ‘너에게 가는 길’ 등 ‘리틀잭’에는 유난히 되풀이 되는 넘버들이 여럿이다. 김경수는 이 중 ‘심플’이 잭이 가장 많이 들려주고 싶은 노래였을 것이라고 전한다.

“줄리와 처음 했던 곡이잖아요. 성공 후 공연장에서 난동을 부리고 다시 오디션을 보러 갔을 때도, 오랜만에 기타를 쳤을 때도 ‘심플’을 떠올리죠. 줄리가 계속 공존해 있는 느낌이거든요.”

잭의 원동력, ‘연인들을 잃더라도 사랑은 잃지 않으리라’

 

▲뮤지컬 ‘리틀잭’의 김경수.

 

‘그러니 죽음이 결코 지배하지 못하리라. 하여 미칠지라도 모두 온전해질 것이며 바다로 가라앉을지라도 모두 다시 솟구치리라. 연인들을 잃더라도 사랑은 잃지 않으리라.’

다소 난해하고도 함축적이며 은유적인 딜런 토마스의 ‘그러니 죽음이 결코 지배하지 못하리라’라는 시는 ‘리틀잭’ 감정과 정서의 핵심과도 같다.

“직접적인 표현보다 은유적이고 함축적인 표현들이 분석에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죠. 극중 인용되는 딜런 토마스의 시도 그 자체로는 어려워요. 하지만 잭과 줄리가 공유했던 시였고 마지막에 쉬운 말이 있어요. ‘연인들을 잃더라도 사랑은 잃지 않으리라’. 이 마지막 구절을 토대로 극에 이입할 수 있었죠.”

줄리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시를 읽고, 그 시를 읽으며 줄리를 더 많이 생각하고…마치 잭처럼 딜런 토마스의 시를 읊고 또 읊으며 줄리를 떠올리는 원동력을 얻었다.

 

노래실력 뽐내기 보다는 캐릭터 표현에 집중

 

리틀잭’은 벌써 2016년의 네 번째 출연작이다. 차기작 ‘라흐마니노프’, 아직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이후 작품까지 이미 정해진 김경수는 공연계의 대표적인 ‘열일’(열심히 일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다. 게다가 최근작에서의 역할들은 하나같이 쉽지 않은 감정을 오가곤 했다.

“각 작품마다 배역을 위한 매뉴얼이 있어요. 각 작품마다의 배역을 분석한 노트인데 그 배역이 조심해야할 부분을 적어뒀죠. 그 매뉴얼을 잘 지키는 저를 만들려고 노력해요.”

그는 노래를 잘 하는 배우다. 하지만 배역에 따라 노래하는 스타일이 전혀 달라지는가 하면 같은 작품의 1, 2막이 딴판인 경우도 있다. 급기야 감정을 위해 멜로디를 포기하기도 한다.

 

▲뮤지컬 ‘리틀잭’의 김경수.

 

“다양하게 부를 줄도 알아야 하고 어떤 때는 노래를 포기할 줄도 알아아 해요. ‘빨래’를 할 때는 노래 못한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노래를 하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노래를 하기 보다는 솔롱고의 감성을 지키자고 생각했죠.”

그의 이같은 시도에 노래에 대한 지적이 이어져 제대로 불러보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노래를 못한다는 평을 듣더라도 좀더 솔롱고처럼 보이자는 자신의 소신을 믿었다. ‘파리넬리’의 리카르도는 1막과 2막이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랐다. 노래라기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부르짖음 혹은 감정을 뱉어내는 듯했던 그는 2막에서 절규하듯 노래하며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했다.

“다양한 의견들, 평들이 있지만 결국 무대에서는 얻어걸리는 게 더 많아요. 저도 모르게 즉흥적일 때가 있고 상대와 감정을 주고받다보면 그 에너지에 반응해 자연스레 완성되는 연기들이 있거든요. 악보에 있는대로 지키면서 노래를 부르면 뮤지컬이 아니라 콘서트가 되겠죠. 얼마나 많은 드라마를 전달하고 싶은지가 보여야할 것 같아요.”

이에 그는 상대배우와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아무리 대단한 배우들이라도 상대배우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 무대의 묘미다.

“무대 위에서는 능력도 사실은 별로 안중요하더라고요. 저도 부족한 게 있으니까요. 서로 인정하고 내려놓는 게 중요하죠. 상대의 부족한 점을 내가 어떻게 채워줄 수 있을까, 그의 장점은 어떻게 살려줄까를 고민하다 보면 사람 사이에 케미(화합, 궁합)가 생기는 거 같아요.”

 

“저는 진짜 단 한번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소위 배우들의 퇴근길(공연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적지 않은 팬들이 포진하고 있다. 그리곤 “너무 잘하세요!”, “멋져요” 등 찬양에 가까운 칭찬들을 시종일관 외쳐댄다.

“아무리 좋게 말씀해주셔도 절대 착각하지 않아요. 매번 연기적으로 고민이 많아지고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거든요. 여전히 연기가 어렵고 잘 하고 싶다는 갈증이 있어요. 팬들이 해주시는 말씀들 중 가장 잘 걸러서 들을 수 있는 말이 ‘잘한다’예요. 착각하는 순간 저는 끝인거죠.”

데뷔 8년차, 한해도 ‘열일’배우가 아닌 적이 없었으니 무대 경험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를 ‘갓난쟁이’란다.

“(무대에 오른)횟수만 있지 연기 고민을 깊게 한 지는 얼마 안됐어요. 사실 저 자체도 뮤지컬에 대한 편견을 깬 지 얼마 안됐거든요. ‘뮤지컬은 노래잖아! 보여드려야지’라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결국 중요한 건 음악적 발성과 고급스러운 소리 보다는 뭘 말하고 싶은지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게 영순위죠.”

‘노래만 잘하면 된다’는 뮤지컬에 대한 편견을 깬 작품이 2012년에 초연된 ‘왕세자 실종사건’이다. 이 작품을 만나면서 그는 처음으로 노래가 아닌 캐릭터와 극에 집중하게 됐다.

“모든 것이 다 처음 시작하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부끄럽게도 몸도 잘 못쓰고 춤도 잘 못춰요. ‘왕세자 실종사건’은 몸도 많이 써야 했고 정서적인 부분을 많이 배웠죠.”

극을 끌어가는 정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가는 방법, 퇴장 중에도 감정을 지켜야 하는 이유,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흐름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등을 절실히도 배웠다.

“퇴장이 퇴장이 아닌 걸, 전신과 다음 신을 잇기 위한 브릿지를 만들고 있어야 한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어요. 정말 부끄러운 얘기죠. 브릿지를 고민하는 순간이 있고 없고는 미세한 차이일 수 있지만 극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거든요. 2012년에야 그걸 알았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차기작 ‘라흐마니노프’, “좀 더 쓰임받는 배우이고 싶어!”

▲뮤지컬 ‘리틀잭’의 김경수.

 

‘리틀잭’ 공연과 더불어 박유덕·안재영·정동화가 함께하는 차기작 ‘라흐마니노프’ 연습에 한창인 김경수는 아마추어지만 비올라 연주자였던 니콜라이 달 역을 위해 비올라 교습 중이다.

 

‘리틀잭’의 기타, ‘라흐마니노프’의 비올라, 본공연이 되길 바라는 ‘광염소나타’의 피아노까지 최근작들은 그에게 또 다른 목표를 세우게 했다.

 

“기타연주도 사실 아직 멀었지만 클래식 피아노, 비올라 등 어차피 시작한 악기를 익혀버리고 싶어요. 악기를 잘 다루면 좀 더 쓰임받는 배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게다가 재밌어요. 팝이든 클래식이든 음악, 예술가를 다루는 작품이 너무 좋아요.”

김경수는 자신이 좋아하고 하고 싶은 작품에 쓰임받기 위해 목표를 세울 줄 아는 배우다. 그런 배우가 소개하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달 박사는 극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라흐마니노프가 소개받은 그 많은 정신의학과 박사들을 물리치고 달 박사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뻔한 사람이거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거죠. 그래서 오히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캐릭터예요.”

무대에서 만큼은 김경수가 아닌 캐릭터가 보였으면 좋겠다는 그의 꿈은 ‘좋은 배우이자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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