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국민에게 공분을 샀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발단을 찾아 올라가 보면 재미있게도 화장품 회사 네이처 리퍼블릭의 정운호 대표가 나온다.
국내 화장품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업계 5위에 오를정도로 사업 수완이 좋았던 정운호 대표는 2012년 부터 수백억원대의 해외 원정 도박을 다니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도박혐의로 수사를 받을때마다 전관예우를 받았던 타락한 법조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십억원의 금품과 향응이 오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판, 검사출신의 변호인들은 정운호의 뒤를 봐주는 조건으로 자신들의 후배인 현직 판, 검사들에게 로비를 한 사실도 드러났으며 국민으로 하여금 법조계를 불신하는 사회적 풍토를 만들었다.
이렇게 돈과 권력을 쫓으며 망가질데로 망가진 현재의 법조인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법조인이 없었을까?하면 그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한평생 대쪽같이 법조인의 자존심을 지켜온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이 있기 때문이다.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김병로는 어릴 적 집안 가풍에 따라 성리학, 유교를 배우며 자라나다 18세 이후 전남 담양의 일신 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 선교사들에게 신학문을 접하고 법조인으로서의 꿈을 키우다 1910년 일본의 니혼대학과 메이지대학의 법학부로 유학을 간다.
유학 시절 경술국치 소식에 충격을 받아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김병로는 폐결핵까지 걸리며 어렵게 유학생활을 이어갔고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1915년에 귀국, 1916년에 경성법대 조교수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19년에 밀양지법 판사를 역임하고 1920년엔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변호사 시절에 그는 무료로 독립운동가들을 변론하였고 105인 사건을 비롯한, 대동단 사건,여운형,안창호 등이 연루된 치안유지법 사건, 흥사단 사건 ,6.10만세운동 ,간도참변 ,대한광복단 사건 등 100여 건이 넘는 사건들의 변호를 맡았다. 이런 김병로의 변호사 활동에 일제는 사사건건 시비와 방해를 하였고 결국 변호사 자격까지 정직처분을 내린다. 결국, 김병로는 해방이 될 때까지 13년간 경기도 양주의 농부로 살아간다.
일제의 패망 후 광복이 되자 김병로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뉜 여러 인사를 고루 만나며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결국, 이승만 정부가 세워지고 이승만 내각의 초대 대법원장으로 선임이 되어 다시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살게된다.
1949년 반민 특별법이 제정되고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맡아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하려던 김병로 대법원장. 하지만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건건 방해를 했고 결국 이승만은 6.6 반민특위 공격사건을 일으켜 강제로 반민특위를 해산한다. 이에 김병로는
‘6.6 사건은 중부경찰서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 내무부의 명령에 따라 빚어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경찰의 이 행위는 직무를 초월한 과잉이며 불법이올시다.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므로 국회와 정부 당국은 비상시국에 적정한 정치적 조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사법기관에서는 추호도 용서 없이 법대로 판단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헌법을 무시하고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독재를 꿈꾸었지만, 김병로 대법원장은 ‘통과된 법이라 할지라도 헌법정신에 위배 되는 것이라면 국민들은 입법부의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고 맞선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김병로 대법원장을 압박하며 사직을 종용했지만 김병로 대법원장은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시오,
라며 정면으로 이승만 대통령과 맞선다. 그렇게 사법부의 독립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힘쓰던 김병로 대법원장은 정년의 임기를 끝내고 1957년 12월 대법원장을 퇴임하게 된다. 그는 퇴임사에서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는 명언을 남기고 노후를 보내다 63년 1월13일 78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게 된다.
평생 약자와 민족을 위해 노력했던 ,민주주의와 사법부의 정의를 위해 살아온 김병로 선생.
‘정의를 위해 굶어죽는게 부정을 범하는것보다 수만배 명예롭다, 며 평생 법조인들의 청렴을 강조했던 그는 일제에 의해 변호사 직무를 정지당해 농부로 살았을때도 일제가 배급한 식량을 받지도 않고 살았다.대법원장 시절에는 월급이 너무 적어 투덜거리던 법무부 직원에게 ‘나도 죽을 먹고 있으니 조금만 참고 살자, 고 다독였고 잉크병이 얼 정도로 추운 법원 내부에도 영하 5도가 되기 전까진 난방도 하지 말아라 주문했으며, 다른 관청은 질 좋은 외국 용품을 쓰는데 우리만 질 나쁜 국산을 쓴다는 직원에겐 ‘나라가 해방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국록을 먹는 우리가 아니면, 우리 산업은 누가 키우느냐?!,하시며 청렴과 애국을 강조하셨다. 이런 김병로 대법원장이 살아계셨다면, 현재 돈과 권력앞에 타락한 이 땅의 법조인 후배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2017년 다시 세워질 대한민국엔 부디 김병로 선생같은 정의로운 법조인들이 많이 생겨나 대한민국을 정의로운 국가로 재건하는 노력을 해주길 바라본다.